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한국어판 서문
이 책에서 필자는 선진국들이 현재 후진국들에게 강요하는 정책과 제도가 과거 자신들이 경제 발전 과정에서 채택했던 정책이나 제도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따라서 후진국들에 대한 그들의 '설교'가 얼마나 위선적인 경우가 많은지를 보이고자 했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경제 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에는 보호 관세와 정부 보조금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켜 놓고 정작 지금에 와서는 후진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채택하고, 보조금을 철폐하라고 강요한다. 과거 자신들은 여성, 빈민, 저학력자,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후진국들에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경제 발전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다른 나라의 특허권과 상표권을 밥 먹듯이 침해했으면서도 이제는 후진국들에게 지적 재산권을 선진국 수준으로 보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지난 십수 년간 경제 발전론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과정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접하게 될 때마다 언젠가는 이런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왔다. 그러나 다른 일에 쫓겨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2000년 가을에야 집필에 착수할 수 있었다.
2001년 여름 원고를 탈고한 데 이어 2002년 6월 영국에서 출간이 이루어진 후 이 책에 대해 세계 각지의 독자들이 보여 준 호의적 반응에 대해서는 감사할 뿐이다. 많은 독자들이 편지나 이메일을 통해 잘 읽었다는 말을 건네주었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 터키, 이란, 홍콩 등지에서는 신문, 잡지, 방송을 통해 소개되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이 책을 바탕으로 필자가 프랑스의 <<Le Monde Diplomatique>>에 기고한 글은 불어에서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아랍어를 비롯해 1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지난 2003년 10월에는 이 책의 터키 어판이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1년 내에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엣 프랑스어, 스페인 어, 포르투갈 어로 출간될 예정이다. 또 최근 한 이란 출판사가 페르시아 어판의 출간을 결정하였으며, 아르헨티나의 한 출판사는 남미용 스페인 어판을 내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고 한다. 시사성이 강하고 평이하게 썼다고는 하지만, 학술서로서는 분에 넘치는 호응을 얻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에서 한국어판으로 나온다고 하니 감회가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시기적으로 좀 늦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영국에서 출간된지 거의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어판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이 오히려 이 책을 내기에 적당한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자괴감에 빠져 우리 것은 무조건 틀렸고 선진국, 특히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는데, 이제 점차 냉정을 되찾아 지난 5~6년간 우리가 걸어 온 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선진국 숭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선 선진국과의 생활수준 격차가 엄청났고,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도 우리나라가 매우 후진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선진국은 무조건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아직도 고급스러운 곳에 가면 "야, 여기 꼭 외국 같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외국 = 선진국 = 좋은 곳'이라는 이들 세대의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경우 1980년 광주사태를 일으킨 군부를 미국이 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선진국이라고 꼭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의 무조건적인 선진국 숭배는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잘 살게 되고, 세계 시장에서 선진국의 유수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된 것도 선진국에 대한 우리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데 적지 않게 공헌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우리의 선진국 콤플렉스는 어떤 면에서 예전보다도 더 강력한 형태로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경제 위기가 우리의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일어났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제 잘못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우리도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라 할 수 있는 선진국의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절대 명제가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식이 지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내국인이 외국인에 비해 역차별을 받게 되는 사례가 사회적 문제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가령 경제 위기 과정에서 공적 자금을 투입해 국유화된 기업을 파는데, 국내 자본에 팔았으면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부패를 의심할 만한 가격에 외국인에게 파는데도 별 말이 없다. 또 국내 기업에 대해서는 고도의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투명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외국계 펀드가 들어와 국내 기업을 위협하는데도 잘 된 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는 미국에서 엔론과 같은 대규모 기업회계 부정 사건이 벌어져도 미국 시스템의 문제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부정을 제때 잡아낼 수 있는 미국 시스템이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우리나라 구체제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극좌 민족주의자 아니면 수구반동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특히 자본의 국적성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일축되기까지 한다. 상대편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논의 자체가 적절치 않다니, 이 무슨 전체주의적 사고인가? 후진국으로서 식민지 경험까지 한 우리나라가 이같이 선진국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특히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강화된 자괴감을 감안하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필자가 이 책을 집필할 때에 특별히 우리나라를 마음에 두고 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지나친 열등감과 자괴감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간절하다.
이 책이 선진국의 위선을 지적한다고 해서 선진국에서 배우지 말자거나, 우리는 위선이 없는 훌륭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배워야 한다. 이 책에서도 누누이 지적하지만, 지금의 선진국들도 자기보다 더 발전한 나라들에게서 의식적으로 배웠기에 성공한 것이다. 다만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완전히 선진국이 되지 않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그리고 다른 후진국들의 입장에서도) 지금 선진국들이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며 우리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단계에서는 어떤 정책과 제도를 썼는지를 잘 살펴보고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또 우리 역시 위선적인 행동을 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과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력하게 보호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그런데 이제는 WTO 협상에서 앞장서서 후진국들에게 관세 장벽을 낮추고 외국인 투자 규제를 풀라고 떠들고 다닌다. 신병 시절 구타를 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일등병이 신병을 구타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끝나면 그래도 낫다. 공산물 관세나 외국인 투자 문제가 나오면 개방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정작 우리에게 불리한 농산물 보호 문제가 나오면 우리는 아직도 후진국이라며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를 협상의 목표로 삼는다. 자기 편한 대로 이편에 붙었다가 저편에 붙었다가 하는 '박쥐 외교'나 다름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박쥐 외교'가 우리가 강한 (공업) 분야에서는 이득을 최대화하고, 우리가 약한 (농업) 분야에서는 손해를 최소화하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중간에 낀 우리나라 같은 입장에서는 국익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변호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근시한적인 관점이다. 이렇게 '소승적'으로 행동하다가는 장기적으로는 국제 사회에서 믿을 수 없는 나라, 말 바꾸는 나라로 낙인 찍혀 고립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국익을 해치게 된다.
차라리 우리의 중간자적 입장을 이용하여 국제 사회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높이려 하는 '대승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국익을 위하는 길이다. 우리의 경우 선직국에게는 얼마전까지 후진국이었던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진국의 어려움에 대해 알려 줌으로써 현재도 후진국에 불리하게 되어 있고, 점점 더 이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가는 국제 경제 질서를 개선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후진국들에게는 세계 시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내 우리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개방을 무조건 두려워하지만 말고 세계화에 동참하되 같이 힘을 합하여 부당한 국제 경제 질서를 차근차근 바꾸어 나아가자고 권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진국에 대한 지나친 열등가을 극복하고, 동시에 우리의 민족주의를 대승적으로 승화하는 데에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한국어판 출간을 앞둔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한국어판을 내는 과정에서 저자가 한국인인데 직접 번역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영어로 출간된 책을 필자가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한국 독자들에게 맞는 방향으로 수정을 하게 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결국은 '다른 책'을 쓰게 되기 쉽다고 판단하여 번역 출간을 고집하였다. 다행히 번역을 맡아 주신 형성백 씨가 여러 나라, 여러 시대에 걸친 내용을 마고 있기에 결코 번역하기 쉽지 않은 이 책을 잘 번역해 주어 필자의 고집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2004년 4월 장하준
그래도 알아두면 좋을 정보들이 많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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