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이외수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비어 있기를 빕니다.
더러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또 더러는 굳게 닫은 마음의 문에 육중한
자물쇠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갈수록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겨울입니다.
당신도 해마다 겨울이 되면 더욱 철저하게 버림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는지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가출해서는 한정없이 방황만 계속하다가 낯선 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밥을 굶거나 동전을 구걸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더 이상 머무를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상태로 역사 주변을 서성거리면 어느새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문득 생각해 보니, 오늘이 바로 한 해의 마지막 날. 당신도 불현듯 울고 싶은 심정에 처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지만 누군들 겨울에 폐병을 앓아보지 않았으리요. 누군들 겨울에 언 빵을 씹어보지 않았으리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단 하나 믿었던 당신의 애인마저 떠나간 지금,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 하나가 얼마나 눈물겹고 갸륵한지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마음속을 들여다 보면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만 가득 들어차 있는 법, 당신의 애인도 혹시 그들처럼 별볼일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 이토록 삭막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묻지를 말아 주십시오. 이 세상 모든 어려운 문제를 푸는 열쇠가 바로 당신 가슴 안에 들어 있으니까요.
당신이 비록 돈 없고 빽 없고 못생긴 사람이라 하여도 아직 사랑을 할 수는 있겠지요. 사랑으로써 풀리지 않는 자물쇠란 이 세상에는 단 한 가지도 없으므로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더 은혜로우십니다.
저는 지난 여름과 가을에는 한 컵의 사랑도 없는 상태에서 폐와 간과 위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지금은 더욱 악화되어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입니다. 겨우 이 한 권의 소설을 써놓기는 했지만, 너무도 엉성해서 낯만 자꾸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마지막 줄을 보아 주십시오. 거기에는 하늘이 저에게 주신 선물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 속에 담긴 비밀을 푸신다면, 맹세컨대 당신은 곧 거듭 태어나실 수가 있습니다. 그 선물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싶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열려 있기를 빕니다.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비어 있기를 빕니다.
1982년 11월 20일 李 外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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